Column : 그 많던 흑돼지는 어디로 갔을까
Column
그 많던 흑돼지는 어디로 갔을까

순수 혈통을 자랑하는 제주 토종 흑돼지 ‘김문’의 자손을 만나고 왔다.

대대손손 손 귀한 집안 자제들인 터라 드넓은 풀밭과 쾌적한 돈사를 자유롭게 오가며 여유롭게 진흙 샤워를 즐기고 있었다.

한경면 두모리의 한적한 길을 달리고 있었을 때 농장 입구임을 알리는 작은 간판이 하나 보였다. 웃자란 풀숲 사이로 자동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구불구불한 흙길이 나 있었다. 그 길 끝에 벽돌 건물이 보였고 60여 마리의 제주 토종 흑돼지를 사육하는 김응두 씨는 수련 핀 연못가에서 망치질하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백일홍 나무는 붉은 꽃을 잔뜩 피워냈고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를 뜯어먹는 누렁소 몇 마리가 보였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정신 나간 수탉은 마당을 뛰어다니며 벌레를 잡아먹고 있었다. 농장 주인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면서 부리나케 곁눈질을 하였으나 보고싶던 흑돼지는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특유의 돈사 냄새도 나지 않은 터라 돼지의 존재가 꽤나 궁금했던 것 같다.

김응두 씨는 제주에서 유일한 생계용 토종 흑돼지 농장을 운영한다. 작은 중산간 마을인 두모리에서 1만5000여 평의 농장을 오직 60여 마리 흑돼지를 기르는데 사용한다. 이곳에서 출하한 돼지는 모두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협재의 토종 흑돼지 전문 식당에서 소비된다. 김응두 씨가 제주 토종 흑돼지를 기르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 초반 무렵이다. 당시 제주의 토종 돼지는 거의 자취를 감춘 때였다. 양돈돼지에 비해 몸집이 작고 오래 길러야하는 토종 흑돼지는, ‘청결한 생활 환경’을 강조하며 호들갑 떨던 새마을운동 당시 돗통시(변소 겸 돼지우리)가 개조될 때 그것과 함께 사라진 터였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돗통시에서 흑돼지 한두 마리씩은 키웠죠. 본래 제주에선 집안이나 마을의 온갖 행사에 돼지를 빼놓지 않으니까요. 그러다가 빨리 자라고 고기를 많이 얻을 수 있는 외래종 돼지와 재래종 흑돼지의 교잡이 성행하면서 점점 토종 흑돼지는 사라져갔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토종 흑돼지의 멸종 위기를 감지한 제주도에서 부랴부랴 제주 곳곳을 뒤져 녀석들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제주 축산진흥원에서 순수 혈통의 흑돼지 암놈 4마리와 수놈 1마리를 발견했다. 1986년의 일이다. 그 수놈에겐 ‘김문’이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후손 생산에 몰두했던 흑돼지 김문이 바로 지금 제주에 존재하는 모든 토종 흑돼지의 조상인 셈이다. 김응두 씨의 흑돼지들도 마찬가지로 김문의 자손이다.

돼지비계 좀 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김응두 씨는 13~15개월 된 흑돼지를 출하한다. 그때 즈음 몸무게가 100kg에 달한다. 양돈돼지는 훨씬 생육이 빠르다. 불과 6개월이면 100kg을 훌쩍 넘는다. 오래 길러야하니 사료 값도 몇 배나 든다. 몸집이 작은 토종 돼지라 해도 많이 먹는 것은 매한가지이니 돼지는 돼지다. 토종 흑돼지 한 마리를 13개월 동안 기르기 위해선 600kg 이상의 사료가 필요하다. 비용이 결코 만만치 않다. 게다가 평균 2년에 걸쳐 3회 정도 출산하는 토종 돼지가 한 번에 낳는 새끼는 6~7마리. 양돈돼지는 한번에 15마리도 거뜬하니 누가 봐도 양돈돼지의 승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응두 씨는 재래종 흑돼지 편이다. 뼛속까지 제주사람인 그에게 있어 토종 흑돼지는 자존심이다. 게다가 재래종 돼지는 오랜 세월 제주의 척박한 풍토와 기후에 적응해 살아남은 튼튼한 형질을 지녔다.양돈돼지에 비해 질병에 걸릴 위험이 현저히 낮기에 무항생제 사육이 가능하다.

그 역시 법으로 정해진 예방주사 외에는 일절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토종 흑돼지 고기의 특별한 맛도 빼놓을 수 없다. 1년 이상 길러 출하하는 토종 흑돼지는 유난히 쫄깃한 식감을 가졌다. 비계 때문이다. 돼지고기 맛은 비계가 결정한다고 그는 단언한다. 고기 맛 좀 안다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의할 듯하다. 입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운 고기를 무조건 최고의 고기라 하겠는가.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굳이 비싼 돈을 내고 흑돼지 고기를 사먹는 것은 특유의 졸깃함과 고소함 그리고 입 안에서 툭 터지는 쥬이시한 육즙 때문일 것이다.

김응두 씨를 따라 농장의 이곳저곳에 흩어진 흑돼지를 찾아 나섰다. 얼마 전 새끼를 낳은 돼지가 운동장만한 흙밭에서 새끼들과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난지 6개월 즈음 된 어린 돼지들은 한데 모여 놀고먹을 궁리 중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토종흑돼지가 정말 똘똘하냐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똑똑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새끼를 향한 모성애가 엄청나게 강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새끼를 낳으면 주인조차 한동안 분만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새끼를 빼앗길까하는 스트레스에 어미가 새끼를 물어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젖도 여느 돼지보다 오래 먹인다. 어미젖을 충분히 먹고 넓고 쾌적한 환경에서 뛰어놀며 항생제 없이 자란 돼지는 분명 의미있는 식재료가 될 것이다.

돼지 문화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리사이클링의 힘

역사 속 제주 토종 흑돼지는 중국 진나라 때 쓰인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등장할 만큼 오랫동안 사육돼 온 대표적 가축이다. 토종 흑돼지는 유난히 얼굴이 좁고 주둥이가 길다. 귀는 짧고 반듯하게 서 있으며 안면과 콧등에 주름이 많고 궁둥이가 작다. 가축 시장에서 토종 흑돼지가 좋은 등급을 받기 어려운 것도 사육 일수가 길어 지방층이 두껍고 햄으로 가공되는 엉덩이와 뒷다리 살이 양돈 돼지에 비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돼지는 제주 사람들에겐 가축 그 이상의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돼지는 농사에 필요한 거름을 생산하고 사람이 배출하는 다양한 배설물과 생활 폐기물을 처리하며 최후에는 비육돼 의례와 추렴의 음식이 되는 등 인간의 삶과 중요하게 연결돼 있었다. 제주대 주강현 교수는 여러 기고문을 통해 제주도의 힘이 우영팟이며 그 우영팟 한 귀퉁이에 자리하던 돗통시를 주목해야한다고 언급했다. 돗통시를 통한 돼지 사육은, 자연스러운 폐기물 처리와 사료 조달, 비료 공급이라는 다양한 장점을 가졌다고 말한다.

사람과 돼지, 텃밭 그리고 다시 사람으로 연결되는 이러한 순환의 리사이클링(Recycling)은 제주 사람들의 환경 친화적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문화라는 점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잔치나 제례 등의 경조사에 돼지고기 요리가 빠지지 않는 것도 제주의 음식문화 속 돼지의 확고한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잔치 음식에는 족과 내장까지 돼지의 모든 부분이 사용된다. 돼지고기의 여러 부위를 해조류나 나물과 함께 푹 삶아 조리해 마을 사람 전체가 나누어 먹었다. 다산과 생산을 상징하는 돼지는 제주의 설화에도 등장하며 김녕의 돗제 등 돼지를 바치며 제를 올리는 풍습이 남아있는 마을도 있다.

2015년 봄, 제주의 토종 흑돼지가 천연기념물 제550호로 지정됐다. 천연기념물 지정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제주에서 더 이상 흑돼지를 먹지 못하게 된 것인지를 궁금해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제주 축산진흥원에서 사육 중인 순수혈통의 260여 마리에 한해 지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김응두 씨의 60여 마리 토종 흑돼지를 비롯해 현재 제주도 내의 흑돼지 농가에서 사육 중인 8만여 마리의 일반 흑돼지는 여전히 자유롭게 식탁에 오를 수 있다. 축산진흥원에서는 향후 사육 중인 토종 흑돼지의 번식을 통해 일부를 기념물 지정에서 철회해 일반 농가에게 보급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멸종 위기를 넘어 다시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 속에서 좀 더 쉽게 만날 수 있도록 토종 흑돼지의 선전을 기대해본다.

1.대가리 (머리)
2.접짝뼈 (앞다리 위 어깨와 살)
3.휘양도레기 (턱이 붙은 목)
4-5. 전각 (앞다리 2개)
6-7. 갈리 (갈비뼈와 살)
8.숭 (뱃살)
9.일룬 (허리, 갈비뼈 뒤 끝에서 뒷다리 앞 끝까지)
10-11. 후각 (뒷다리 2개)
12. 부피 (엉덩이, 뒷다리 위 끝에서 뒤 꽁지까지. 반드시 꼬리가 달려있어야 함)

‘추렴’은 고기가 필요한 사람끼리 모여 소나 돼지를 잡아 고기를 나누어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소를 잡는 일을 큰 추렴이라 하고, 작은 추렴은 돼지를 잡는 일을 말한다. 예전에는 돼지를 집에서 기르다 대여섯 명이 함께 추렴하는 일이 많았다. 한편 결혼과 포제(마을제) 등 제주의 통과의례 음식에는 대부분 돼지고기가 주인공이다. 특히 마을 축제로 치루는 혼례의 경우, 잔치 2~3일 전 정성들여 기른 돼지를 동네 도축전문가를 데려다가 잡는데, 잡은 돼지의 간과 북부기(허파), 배설(소장)을 잔치 준비를 맡은 가까운 이웃이나 친척에게 먼저 베푸는 풍습이 있다. 이러한 것을 ‘가문잔치’라 부르며 오직 제주만이 갖는 독특한 전통이다.

*추렴 명칭 및 내용 출처 [제주생활문화 100년](제주문화원, 2014)

2015, Autumn
p 048 ~ 054
고선영 / 그림 이소현